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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선동열의 고교야구 시절 yakujoa


출처> 野生野死 야구에 죽고 사는 .. | CAU PHARMACY





안경을 끼지 않은 최동원의 모습은 낯설다.
까까머리 최동원의 고교야구 시절을 알아보자.


최동원은 고교 1학년 때부터 강팀들과의 경기에 등판하여 좋은 투구내용을 보여준다.

74년 봉황기 우승팀이자 황금사자기 준우승 팀인 대구상고와의 전국우수고교야구대회 패자 결승전에서 최동원은 구원 등판하여 경남고의 승리를 지켜낸다. 1학년 때부터 차원이 다른 투구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75년 화랑기 준결승전 대구상고와의 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두었고 결승전에서는 경남상고와 일전을 치루게 된다.

이 경기는 투수전의 백미였고 최동원의 연투 능력을 보여준 대회였다.
8월 4일 대구상고와의 준결승전에서 완투한 최동원이 5일 경남상고와의 결승전에 또 다시 선발로 등판한 것이다.

결승전에서 연장 14회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6일 재경기를 하게 된다.
재경기에서 최동원은 또 다시 등판하지만 폭투와 유격수 장제환의 1루 악송구로 결국 1:2로 패배하게 된다.


노히트노런! 75년 2관왕이었던 강호 경북고를 상대로 달성한 기록이라 더욱 값어치가 있다.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다음날 최동원은 또 다시 등판하여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경남고를 결승전에 진출시킨다.

그리고 서울의 맹주 선린상고를 상대로 역투를 하면서 경남고를 우승으로 이끈다.


이어 갑자원대회 우승팀인 니시라노 고교와 대결을 하게 되는데,
니시라노 고교와 붙은 고교 2학년생 최동원은 거침이 없었다. 갑자원 우승팀은 최동원에 눌려 고전하다 겨우 승리를 거둔다.


3학년이 된 최동원은 만개한다. 4개 도시 초청 고교야구 대회에서 경남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선수상을 받는다.

이어 청룡기 8강 경북예선에서 강호 대구상고를 꺾고 올라온 대건고를 상대로 삼진 10개를 잡아내며 경남고를 4강으로 이끈다.
대건고와의 경기에서 최동원은 4번타자로 나와 타점까지 올리는 전천후 활약을 한다.

76년의 청룡기는 최동원의 독무대였다.
4강전에서는 우승후보 선린상고를 상대로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1:0으로 승리하면서 경남고를 승자결승으로 이끈다.

76년 청룡기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승자 결승전이었다. 상대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최동원은 호남의 맹주 군산상고를 상대로 무려 2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고교야구에는 더 이상 적수가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최종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또 다시 군산상고였다.
최동원의 상대 투수는 KBO 초창기에 투수로도 10승을 거두었던 그 유명한 김성한이었다.

고교 무대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던 최동원에게 군산상고는 힘 한번 못 쓰고 완봉패를 당하게 된다.
이 경기에서도 최동원은 삼진 12개를 기록하면서 고교야구의 절대 강자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최동원에게는 "황금의 오른팔"이라는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니게 된다.


76년 가을에 열린 한일 고교야구 대회 1차전에서 최동원은 한국의 3:1 승리를 이끈다.
1차전에 선발 등판한 일본 대표팀 투수는 NPB의 7천만엔 스카웃 파동의 주인공이었던 사까이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최동원의 원맨쇼로 1, 2차전 연승을 한다.
최동원은 1차전 1실점 완투에 이어 2차전에서는 3회부터 구원으로 등판해서 1실점 호투로 2연속 승리를 거둔다.

<참고> 김성근 감독은 최동원을 3연속 등판시키지 않았다.


고려대로 진학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최동원은 연세대에 가등록을 하여 연세대로 진학하게 된다.


[ 2011년 기사 내용중에서 ]

강속구로 고교야구를 평정한 최동원을 놓고 전국 대학들이 영입 경쟁을 벌였다. 최동원에 대한 비판과 곱지 않은 시선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애초 최동원은 고려대를 가고 싶어했다. 경남고 선배들이 죄다 고려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연세대에 입학했다.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원래 고려대에 입학하기로 학교 측과 이야기가 다 됐다. 그런데 갑자기 중앙정보부(중정)가 개입해 '연세대로 입학할 것'을 종용했다. 알고 보니 중정 고위 관료가 연세대 출신이었다. 고려대 체육담당 관계자가 고초를 겪기까지 했다. 그때 잠자코 연세대에 갔으면 됐지만 오기가 생겼다. '고려대에 못 갈 바엔 차라리 부산 동아대에 가자'고 마음먹었다. 한데, 동아대 측에서 '우리도 최 선수를 영입하고 싶지만 중정에서 최동원을 입학시키면 알아서 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며 '미안하게 됐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연세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최동원이 최초로 털어놓은 연세대 입학 비사는 그랬다.

최동원을 거머쥔 연세대는 장학금으로 500만원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장학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다 370만원만 지급했다. 최동원 측에서 약속한 장학금 지급을 요구했지만 연세대는 "최동원은 자기만 생각한다"며 그를 이기적인 선수로 몰아갔다. 평생 최동원을 따라다닌 "이기적인 선수"라는 악평은 바로 이때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고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77년 1월에는 일본 프로야구 NPB의 스카웃설에 휘말리게 된다.



최동원은 고교시절부터 NPB의 스카웃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동열은 1980년 대통령배에서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기사 중간에 선동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선동열이 올봄 지역대회에서 광주상에 2패을 당하는 열세


선동열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교시절에는 에이스가 아니었다.
에이스라면 결승전에서 선발 등판이 당연한데 선동열은 차동철에게 선발을 내주고 구원으로 등판했다.

7~80년대 고교야구에서는 에이스가 대부분의 이닝을 던지는게 상식이었다.

82년 대통령배 김종석이나 87년 청룡기 구대성처럼 5경기 모두 완투하는 것이 특급 에이스의 역할이었다.
당시 3학년이던 선동열 대신 선발 등판한 투수는 동기생도 아닌 2학년 차동철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니었다.
대통령배 예선 2회전에서 광주일고는 당시 최강이자 전년도 우승팀인 선린상고를 만나는데 선동열은 등판하지 않는다.


타격, 최다안타, 최다타점, 도루, 수훈상 등 5관왕을 차지한 허세환이 아닌,
비교적 약체였던 충암고전에 등판한 선동열이 최우수선수상을 받게되는 촌극이 빚어진 대회였다.


선동열은 고교 3학년때 까지만 해도 최동원, 김시진, 최계훈 같은 투수들 보다 스피드가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80년 광주일고가 강팀인 광주상고, 선린상고, 천안북일고에 승리할 때의 선발투수는 선동열이 아니라 1년 후배인 차동철이었다.
강팀들과의 경기 패턴은 항상 동일했는데, 차동철이 선발로 등판하고 선동열이 구원으로 등판하는 패턴이었다.

고교 시절에도 선동열은 선발투수와는 거리가 먼 투수였음을 알 수 있다.
80년 황금사자기 준결승전에서도 천안북일고를 만나는데 2:0으로 리드하던 5회 2사 후에 등판했다.


이번에는 선동열이 잘 던진 경기를 알아보자.
80년 봉황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선동열!


동대문야구장 개장 이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선동열!
그렇다면 선동열에게 노히트 노런을 헌납한 경기고는 어떤 팀인가?

경기고는 이동현의 활약으로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한 2000년 이전까지 만년 최약체 팀이었다.
전력차가 극심했던 80년대 고교야구에서 조계현, 조규제, 지연규 같은 고교야구 특급 투수들이 최약체 팀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경기고는 강팀들에게 연습 상대도 안 되는 전력이었기 때문에 콜드게임으로 끝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선동열은 이런 경기고를 상대로 9회까지 완투하며 퍼펙트에 가까운 투구를 했다는 것이다.

경기고처럼 최약체 팀이 지역예선을 거쳐 전국대회에 어떻게 출전할 수 있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답은 간단하다. 봉황기는 지역예선을 치루지 않고 모든 팀이 참가하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팀을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선동열은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박노준의 선린상고에게 처참하게 무너진다.


선동열의 고교시절을 돌아볼 때 광주일고 에이스는 선동열이 아니라 차동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선동열은 선천적으로 내구력과 파워가 약했다.


선동열은 79년 한일 고교야구 대회에 후보로 참가한 적은 있지만 출전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