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naver.com/yakujoa

dkoc.egloos.com

포토로그



일본에서도 노모히데오가 스테로이드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npb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에 친일파들이, 야구판에는 일빠들이 대량 양산되었다. 2008년은 작당질의 10년째 되는 해였고 이명박 정부는 바로 잡지 않았다. 아니, 바로 잡는게 아니라 더 키웠다.

그 결과 희대의 사기꾼이자 역대 최고 스테로이드맨 노모히데오가 신격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이없는 건 일본에서도 노모히데오가 스테로이드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노모히데오의 사회인 야구팀 입단에 대해 일본문화원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일본문화원, 즉 일본이 조작한 내용을 일본문화연구소가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그러나 진실은,

"아. 나는 여기서 평생을 일하게 되는 구나"

"나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역사왜곡을 밥 먹듯이 하는 일본도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희대의 사기꾼이 일본의 영웅이라는 진실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증거>>> 아시아 야구사 역대 최고 스테로이드맨 노모히데오






선동열 자서전의 박찬호 메이저리그 계약은 소설 yakujoa


81년에 최동원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했을 당시에 병역 문제 때문에 [한국-캐나다] 정상회담에서도 논의되었고, 그 결과 운동선수들에 대한 병역혜택 법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토론토 시의회 의장과 교포들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 1982년 2월 20일 조선일보 -


한국의 국가대표투수 최동원과 4년계약을 맺은 미프로야구 터런토블루제이스구단은 "18일 최선수가 이번시즌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내년시즌에 입단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면 우리구단에 입단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최선수의 계약위반에 대한 당초의 강경한 입장을 완화했다.

블루제이스의 구단대변인은 이날 최선수의 구단입단가능성을 밝혔는데 글로브매일지는 최선수가 내년에  터런토에 오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블루제이스구단은 최선수가 오는 22일 플로리다주에서 시작되는 올시즌의 춘계훈련에 참가하지 않을 경우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블루제이스구단의 엘리어트파일감독은 앞서 최선수가 메이저리그 또는 마이너리그 게임을 비롯한 어떠한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구단이 최선수가 블루제이스구단에 입단할 의무를 계속 지키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계약이 파기된 이후에도 대단히 적극적이었으며, 실제로 82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최동원이 등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최동원 메이저리그 스플릿 계약 허위사실 유포와 광우병 날조




The Complete Handbook of Baseball 1982 (Zander Hollander, Penguin Group (USA) Incorporated, 1982)


그러나 박찬호는 최동원처럼 메이저리그 계약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선동열 자서전에 있는 이 말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박찬호처럼 유학 편법만 알아서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내 야구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다."


박찬호가 LA다저스와 계약할 당시에는 유학 편법이라는 방법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정부 권력자의 비공식적인 특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1997년 4월 13일 동아일보 -


선동열의 경우에는 극동지역 스카우터에게 조차 관심을 받지 못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 http://www.baseballamerica.com/today/features/worldscout0125.html

웨인모건이 관심을 가진 한국인 투수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최동원, 박동희, 박찬호는 나오지만 선동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특히 최동원의 경우에는 즉시 전력감이라는 판단으로 전례없는 메이저리그 계약까지 했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선동열은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박찬호처럼 특혜로 마이너리그 계약이 가능했다면 내 야구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다."




[문화일보] '큰 손'을 가진 선수 아머와 박찬호


‘One-Two-Waite-Three’

이 말은 백스윙의 리듬에 관한 골프명언으로 토미 아머가 지은 ‘How to play your best golf all the time’ 에 나오는 말이다.

아머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태생의 영국인이다.

대졸 출신의 아마추어골퍼였는데 1920년 프랑스의 아마추어선수권을 차지한 직후 골프볼 회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게 되자 도미(度美)했다.

그런데 아머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탄 배에는 우연히도 그해 영국오픈에 참가한 뒤 돌아가던 월터 하겐도 타고 있었다.

아머가 갑판 위에서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던 하겐은 아머가 상당한 수준의 골퍼임을 느꼈다.

그 무렵 아머는 야위고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관상으로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겐이 아머에게 매료된 까닭은, 아머가 특이하게 큰 머리통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하겐이 아머와 악수를 하면서 그의 손이 자기 손의 배가 될 정도로 큰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겐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만일 이렇게 큰 손과 발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뇌수가 텅 비어 있는 녀석을, 내가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일류 프로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머는 4년 뒤인 1924년에 정식으로 프로로 전향함과 동시에 미국국적을 취득했다. 3년 뒤인 1927년에는 US오픈에서 우승했고 1930년에는 미 프로골프(PGA)선수권대회와 1931년에는 브리티시오픈에서도 각각 챔피언에 올랐다.

그렇지만 아머는 그 당시의 다른 유명선수들과는 달리 선수로서의 수명이 아주 짧아 1935년 이후에는 미국 내에서조차 거의 잊혀 있었다. 그러다가 ‘How to play your best golf all the time’ 을 출간한 1953년 이후부터 그가 사망한 1968년까지 아머는 골프선수가 아닌 골프 교습가로서 불세출의 명성을 얻었다.

미국에 진출했던 박찬호가 마침내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던 1997년 4월경의 일이다. 그 당시 필자는 김영삼 정권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홍인길씨를 변론하고 있었다.

홍씨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한때 볼링 선수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의 손은 엄청나게 커서 볼링공을 한 손으로 잡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병역문제로 미국진출의 문이 막혀 애를 먹고 있던 박찬호가 어느 날 그를 찾아왔다.

홍씨가 박찬호와 악수를 하는데 그 큰 손이 박찬호의 손에 쏘옥 들어가 버리더란다. 홍씨는 곧바로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관님, 어떻게 해서든지 박찬호를 미국에 보냅시다. 만일 박찬호가 LA다저스구장에서 볼을 던지게 된다면 전문외교관 100명으로도 얻을 수 없는 막대한 국익을 틀림없이 얻을 겁니다.”


변호사 · 보나 법무법인 대표




최동원 메이저리그 로스터 보장 계약이 스플릿 계약? yakujoa


메이저리그 로스터(active roster)를 보장받는 계약을 한 최동원의 81년 메이저리그 계약이 스플릿 계약이었다고 날조된 내용이 인터넷에 퍼져 있는 실정이다. 야구 커뮤니티 MLBPARK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 Junghwan과 또 다른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 김형준이 스플릿 계약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메이저리그 해설까지 하고 있는 기자마저 그렇게 해석했으니, 권위에 굴종하는 태도가 생리현상처럼 작동하는 인터넷 세대들에게 그들의 의견은 진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보인다. "5년 계약을 제시"

최동원과 블루제이스의 계약 기간은 4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자칭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스플릿 계약이라고 확신했던 것은 계약서의 연봉조항 때문이다. 사실은 스플릿 계약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킨 결과였다. 80년대 메이저리그 로스터를 보장받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1981 - at the rate of $ 32,500 per year for each day of active Major League service.
1982 - $ 33,500
1983 - $ 66,500
1984 - $ 115,000
1985 - $ 185,000


대충 보면 5년 계약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81년 9월에 계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플릿 계약이 확실하다면 연봉조항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1981 - at the rate of $ 32,500 per year for each day of active Major League service
1982 - at the rate of $ 33,500 per year for each day of active Major League service
1983 - at the rate of $ 66,500 per year for each day of active Major League service
1984 - at the rate of $ 115,000 per year for each day of active Major League service
1985 - at the rate of $ 185,000 per year for each day of active Major League service


다른 형식으로 at the rate of ~ per year가 연봉조항 맨 위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모든 년도에 스플릿 계약 조건이 적용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81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블루제이스는 81년 연봉만 조건부로 명시했던 것이다.




- 메이저리그 로스터(active roster)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내용 -


81년 잔여 시즌에 합류 또는 82년 스프링 캠프 합류시에 1만달러 +
82년 3만 3천 5백달러 +
83년 6만 6천 5백달러 +
84년 11만 5천달러 +
85년 18만 5천달러 +
인센티브(사이영상 10만달러 + 올스타 10만달러) = 4년간 61만달러

알려진 금액과 정확히 일치하며 81년 연봉은 61만달러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ere is no question in our minds he will start his career on the active roster of the Blue Jays."
그(최동원)의 커리어가 블루제이스의 active roster에서 시작될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이너리그 계약을 했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계약으로 날조되었고 진짜 메이저리그 계약을 했던 최동원은, 그것도 active roster를 보장받은 파격적인 계약이 스플릿 계약으로 날조되어 전파되고 있으니, 이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참고> 선동열 자서전의 박찬호 메이저리그 계약은 소설


그리고 최동원의 계약서와 관련하여 이해하기 힘든 사실관계가 있는데,

- 81년에 최동원은 블루제이스에 합류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81년 연봉이 명시되어 있다.
- 최동원은 계약서 자체가 사기였음을 주장하며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 최동원의 보장연봉과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의 차이(1982 ~ 1985) -


82년에만 최저 연봉이고 메이저리그 로스터를 보장받는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최동원의 사기 계약 주장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계약서의 81년 조항은 최동원의 동의없이 블루제이스가 일방적으로 추가한 것이었다. 병역 문제 때문에 가계약을 했음에도 다른 구단의 오퍼를 막기 위해 반칙을 했던 것이다.


다저스가 거액을 제시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해하기 힘든 81년 조항의 내막이며 최동원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블루제이스가 선수 등록을 한 이상, 다른 구단과 접촉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기 계약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한국인 아마추어 선수 때문에 블루제이스는 왜 반칙을 했던 것이며, 81년 LA교민들의 지위가 낮은 편이었다는 점에서 상품성도 없어 보이는 선수에게 다저스는 어째서 거액을 제시했던 것일까? 이 뿐만이 아니다.


82년에 토론토 시의회 의장은 진정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81년에 방한했던 캐나다 수상의 기자회견 내용은 더 황당하다.

토론토 블루제이스팀이 최동원을 잡은 것은 행운이다.
토론토팀이 최동원을 잡으면 메이저리그의 성적이 크게 뛰어오를 것이라고 팀관계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단하는 것은 나중에 태어난 자의 오만이다!" 하버마스가 남긴 말에 해답이 들어있다.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에서 전문가로 통하는 자칭 고수들이 만든 이론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해 봐야 안다!"

과연 자칭 고수들의 이론은 시대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을까? 관련하여 81년 2월 5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고교 1학년 조계현은 공식 경기 기록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최동원의 뒤를 이을 대기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실제로 조계현은 최동원의 고교시절 기량에 필적할만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참고> 조계현은 고교시절부터 급이 다른 투수였다.


81년은 냉전의 절정이었고 스포츠는 체제 대결의 상징이었다. 엘리트 스포츠 시대였다.

그 시절에 특정 종목의 최고 선수는 엘리트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를 의미했고, 따라서 "안 해 봐도 안다!"가 상식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예측 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엘리트 스포츠 시대였기 때문이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아무나 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미국은 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 90년대 중반부터 바뀌게 된다. 당연히 메이저리그는 90년대부터, KBO는 21세기부터 "해 봐야 안다!"가 상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야구팬들은 80년대 한국 야구의 특수한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래 동영상을 보면,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카운트(2-0)에서 동영상의 타자처럼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80년대 KBO의 실업야구 세대들은 그런 대응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스피드와 예각 지점에 따라 최동원의 커브가 어떤 판정을 받게 될지를 예측했던 것이다.

알루미늄 배트가 도입된 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야구사에 최동원만큼 혹사한 투수는, 비슷한 투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80년대 한국 타자들은 고교, 대학, 실업 야구를 거치면서 수없이 최동원을 상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부실한 인프라에서 KBO가 출범했을 때 리그 주력 타자들의 최동원 상대 타수는 평균적으로 세 자릿수가 넘은 상태였다. 투수에게 그 보다 더 한 악조건은 없다! 최동원은 그런 조건에서 KBO 커리어를 시작했던 것이다.


로저 클레멘스의 24년간 메이저리그 커리어에서 세 자릿수 타석을 기록한 타자가 11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최동원 공을 가장 잘 칠 수 있는 타자들은 KBO 타자들이다!"

그래서 80년대 KBO 선수들은 기록으로만 평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꼭 최동원이 아니더라도 실업야구 세대들은 서로간에 익숙한 상태에서 대결을 했기 때문이다.


전성기의 최동원을 알고 있다면 블루제이스가 독점하기 위해 반칙을 했고, 다저스가 거액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가 없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야구사에 최동원만큼 시대를 초월했던 천재는 존재한 적이 없다.




After seeing him pitch in Edmonton, Morgan predicted the right-hander would be the next Dave Stieb.

최동원을 Dave Stieb와 함께 블루제이스를 이끌 에이스급으로 기대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블루제이스는 최동원을 독점한 상태에서도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블루제이스에서 이미 최동원에게 비행기표까지 보냈고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제시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최동원은 왜 메이저리그에 가지 못했나?
그 이유를 취재를 통해 밝혀내는 것이 진짜 기자가 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

<참고> 최동원 메이저리그 스플릿 계약 허위사실 유포와 광우병 날조




최동원 메이저리그 스플릿 계약 허위사실 유포와 광우병 날조 yakujoa


MBC 스페셜에 나온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내용 일부를 근거로 스플릿 계약이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인간들이 있다. 제한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전문 지식도 없는 인간들이 제멋대로 해석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건, 인터넷 시대 이후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야구 전문) 기자들까지 거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문이란 새로운 소식이 담겨있는 종이를 뜻하며 새로운 소식은 취재의 결과인 셈이다. 기자란 취재하는 사람을 뜻하며 취재없이 기사쓰는 사람은 기자가 아닌 것이다. 관련하여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자는 신념을 피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기자가 신념을 피력하면 더 이상 기자가 아닌 것이다. 신념은 사실에 우선할 수 없다.


인터넷 시대 이후에 기자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기자 행세를 하면서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졌다. 특히 인터넷 야구판은 정도가 심각하다. 컴퓨터 앞에 붙어서 숫자 놀음, 외신 검색해서 짜집기하는 인간들이 기자를 자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황당한 건, 그런 가짜들을 목표로 삼은 빠돌이들이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면서 권위있는 전문가로 둔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럼,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이 스플릿 계약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근거부터 보자.





위와 같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인터넷 전문가들은 경이로운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 시대의 대표적인 폐해라 할 수 있는 루키급 스플릿 기자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었다.

메이저급 언론사의 기자들은 이렇게 답변했을 것이다. "단편적인 정보로는 해석 불가능하다."


한심한 인간들이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 언론 어디에도 계약서가 공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신에도 부정확한 추측성 기사들만 존재한다. 그 이유는 1주일도 지나지 않아 파기된 가계약이었기 때문이다.

관련된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분석, 추리하는 능력이 바닥 수준인데 뭔 재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인가?




병역면제 여부만 남아있어

교민들 청원서 서명운동 전개

43만달러에 잠정합의


잠정합의 가계약은 형식적인 합의에 불과하고 세부 내용이 정식 계약서에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스플릿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없으며 구속력도 미약하다. 이와 관련된 기사를 국내 언론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심한 인간들은 찾으려 하지 않았다. 80년대초에 大일본제국의 최정상급 선수들도 꿈에서 조차 언감생심이었던 메이저리그 계약을 한국인이 했다는 사실을 사대주의에 찌든 인간들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81년 9월 25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블루제이스 관계자들도 최근 캐나다에서의 기자회견에서 최동원의 연봉에 대해서는 아직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최동원측과의 재접촉을 계산에 두고 취한 조치인듯.


위의 두 개의 정보만으로도 가계약 내용은 중요하지도 않고 따질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으나 한심한 인간들 눈깔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간에 그 내막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최동원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계획한 최초 시점은 77년으로 추정된다.




최동원은 군 입대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 프로팀에서 기량을 닦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최동원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밖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돌죠. 최동원은 아버지가 망쳤다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신 일은 하나도 없어요. 항상 아버지는 저하고 집에서 먼저 상의하시고 저하고 의견이 일치 된 일만 밖에서 말씀하셨죠. 그렇게 하면서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셨죠. "너는 당사자다. 당사자가 욕을 먹으면 치명적이다. 욕먹을 일은 모두 내가 맡겠다. 너는 내 뒤에 숨어라." 그걸 두고 세상사람들은 아버지가 마음대로 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철두철미하게 제 뜻을 존중하신 분입니다. 아버지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싶어요. 아들을 위해 살다가 가신 분인데, 정작 아들은 아직도 그걸 못해드리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계약과 관련하여 최동원 아버지가 언급된 기사 내용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81년에 최동원은 아직 어린 나이였고, 자신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성급한 계약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81년 9월 24일 기사를 보면,





인터뷰 기사는 신뢰도가 높다. 더구나 최동원은 자신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는 성격으로,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기사보다도 신뢰도가 높다 할 수 있다.


81년 9월 25일 아버지의 발언 전날(24일) 최동원이 동일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조건으로, 그것도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섭해오면 몰라도 갈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해외(메이저리그)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롯데와의 입단 조건에 금년이 지난 뒤 자의든 타의든 외국 프로팀에 입단하게 되는 경우 막지 않는 것으로 합의"


지금까지의 정보로 시나리오를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최동원은 77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계획했고, 81년 실업야구 롯데와 계약할 당시에 그 점을 명시했다. 그래서 블루제이스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하자 성급한 결정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 문제라는 걸림돌이 있었고, 그 때문에 블루제이스는 가계약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에 직접 취재했던 캐나다 한국일보 기자가 발행한 신문을 보면(81년 9월 22일 캐나다 한국일보),





메이저리그 직접진출, [최]측 계약내용에 불만

이상하지 않은가? 계약을 해 놓고 계약내용에 불만?




블루제이스로부터 새로운 연락이 있었다.


81년 10월 16일 기사에서 "최동원의 은퇴선언과 블루제이스로부터 새로운 연락이 있었다"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음날(17일) 기사에서 그 내막을 유추할 수 있다.





위 기사는 3개의 쟁점을 다루고 있고 동일한 출처이다(재미야구협회). 첫 번째 쟁점인 최동원의 81년 드래프트 포함 여부는 확인된 사실이며, 따라서 기사의 신뢰도는 대단히 높다 할 수 있다.


지난 9월 15일 최동원의 입단 계약을 맺은 미국 메이저리그 소속 토론토는 지난 9월 20일 최동원을 81년 드래프트 순위 20번으로 프로야구 위원회에 신청, 최동원의 토론토팀 입단을 기정사실화 시켰다.

어떤 사람이 빌라를 가계약하고 아직 정식 계약이 안 된 상태에서 살림살이를 옮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런데 블루제이스는 불가능한 일을 했던 것이다. 다저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반칙을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팻 길릭 단장이 83년에 서울지방법원에 소송했을 때 이미 패배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블루제이스는 왜 그렇게 조급했을까?


미국 프로야구 커미셔너 보이쿤씨는 작년 8월의 제 1회 산타클라라 월드게임기간 동안에 최동원의 경기 기록과 신상명세서를 각 미국 프로야구팀에 보내 최동원에 대한 스카웃 의사를 타진했었다.

최동원은 78년 세계야구선수권 이후부터 세계적인 선수였다. 그 시절에 최동원만큼 외신에 오르내린 아마추어 야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80년부터 메이저리그는 최동원을 주시했고 81년 대륙간컵 이후에 구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다저스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계약금 20만달러에 연봉 15만달러로 뒤늦게 교섭을 벌여왔으나 토론토 블루제이스팀과 계약한 사실이 밝혀지자 교섭을 중단했다고 재미야구협회 관계자는 전했다.

다저스가 스카웃 경쟁에 가세했고(81년에 계약금 20만달러, 연봉 15만달러는 상당한 금액이었고 LA 교민들의 지위가 낮은 편이었다는 점에서 다저스가 제시한 금액에는 현재의 상품성 개념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자이언츠까지 움직임을 보이자 블루제이스는 가계약 상태에서 최동원을 81년 드래프트에 포함시키는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최동원이 은퇴선언을 한 이유는?
그리고 최동원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블루제이스로부터 새로운 연락이 있었다."

다저스의 거액 교섭과 자이언츠의 가세로 최동원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프로야구(KBO) 출범이 계획된 것이었다.
 
<참고> 81년 8월까지 프로야구(KBO) 출범 계획은 없었다.




과연 증언은 사실일까?

거짓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 있을지를 따져보자. 현재 그(유승민)는 더 이상 기자가 아니며 캐나다 현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어 보인다.


Montreal Gazette 82년 3월 13일



팀 관계자들이 말하길,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파이어볼러 최동원은 나타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증언을 뒷받침하는 현지 기사가 존재하며, 캐나다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블루제이스의 새로운 제안"을 유추할 수 있다.

[ 캐나다 한국일보 ] 블루제이스 유니폼 입을 뻔 했던 최동원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나도 마침 서울에 갈 일이 었어 잠실야구장에 갔다. 팻 길릭과 스카우트 웨인 모간을 만났다.

최동원 선수의 계약은 메이저리그 계약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이러한 호조건으로 입단하는 선수는 없다.

마이너리그에 보낼 수가 없는 계약이었다.


다저스의 거액 교섭(계약금 20만달러, 연봉 15만달러)에 대응하여 블루제이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82년 2월 15일 동아일보



블루제이스에서 이미 최동원에게 비행기표까지 보냈고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제시, 곧 스카우터를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


81년 메이저리그 계약과 냉전이 종식된 90년대 이후의 메이저리그 계약의 가치는 차원이 다르다. 포스팅 시스템이 도입된 21세기 메이저리그 계약의 가치는 또 다르다. 미국 프로야구는 70년대부터 무차별적으로 외국인 선수들을 받아들였는데, 실상은 마이너리그 부활이 목적이었고 아시아 선수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고, 이는 엄격한 검증과정으로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국과 박철순은 더블A에서 트리플A를 포기하고 멕시칸리그와 KBO를 선택했던 것이다. 아시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일본인들만 가능했다. 일본은 80년대 이미 경제 대국이었다. 그런 일본도 힘을 못 썼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참고> 곽태원은 이원국과 비교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미국 백인의 운동능력은 서양인 전체에서 평균 수준에 불과하다. 80년 전후의 야구 선수들은 운동능력이 가장 우월한 선수들의 집합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배구도 80년대는 미국이 세계 1위였다. 그렇다면 야구는 어느 정도였겠는가!

그 시절 미국인들은 강인했고 약물로 무장되어 있었다. 아시아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 벽을 통과하기란 바늘 구멍 통과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81년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은 [한국-캐나다] 정상회담에서도 논의되었을 정도로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내외신기자들과 회견을 가진 트뤼도 수상은 [최동원을 아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서슴없이 [알고있다]고 답변하면서 [토론토 블루제이스팀이 최동원을 잡은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트뤼도 수상은 [토론토팀이 최동원을 잡으면 메이저리그의 성적이 크게 뛰어오를 것이라고 팀관계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밝혀 최동원의 토론토팀 입단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인 병역문제에 대해 토론토팀 관계자가 트뤼도 수상에게 정치적 해결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비췄다.



[한국-캐나다] 정상회담 이후에 최동원은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면담을 했고 운동선수들에 대한 병역혜택 조치가 이어졌다. 전 종목에서 무려 100명이 넘는 운동선수들이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최동원은 혜택을 못 받게 된다.





(MBC 스페셜)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병역혜택) 인정해준다고 떨어진 날부터 5년동안 자기 분야에 계속하고 있어야 돼. 중간에 그만둔다 하면 바로 (군에) 잡혀가야 해. 그러니까 눈치 보면서 할 수밖에 없어요. 혜택은 받았지만.


혜택 관련 법안은 소급 적용되므로 5년동안 자기 분야에 계속 있지 않아도 되었다. 실제로 100명이 넘는 대상자들 중에는 그런 사례가 분명히 존재한다. 소급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최동원은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군대 복무 기간이 30개월에서 24개월로 줄어도 30개월 제도때 입대한 경우에는 혜택을 못 받게 된 것이다. 그런 어이없는 법 적용을 누가 납득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최동원이 은퇴선언을 하면서 반발했던 것이다.

최동원 아버지의 이 말은 그것을 지적했던 것이다. "동원이는 5년간 국가대표로 헌신해 왔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최동원은 77년부터 해외 진출을 계획했고 81년 실업야구 롯데와 계약할 당시에 그 점을 명시했다.
2. 80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직접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 최동원의 스카웃 의사를 타진했다.
3. 81년 블루제이즈는 최동원과 가계약을 했으나 다저스가 거액을 제시하며 접근하자 최동원을 81년 드래프트에 포함시켰다.
4. 성급하게 블루제이스와 가계약한 최동원은 다저스가 제시한 수준의 대우를 요구하며 가계약을 파기했다.
5. 80년대 메이저리그 계약을 한 외국인 투수는 최동원이 유일하며 [한국-캐나다] 정상회담에서도 논의되었다.
6. 블루제이스와 재협상하는 도중 KBO 출범으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되었고 최동원은 은퇴선언을 하면서 반발했다.
7. 82년 토론토 시의회 의장과 토론토 교민회는 최동원을 블루제이스로 보내달라는 진정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
8. 83년 팻 길릭은 서울지방법원에 제소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블루제이스가 최동원만큼 집착했던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Toronto Star 85년 7월 28일



블루제이스와 계약했지만 오지 못한 한국인 투수 최동원을 기억하는가?
최동원은 작년(84년)에 어깨부상에서 회복하고 정규시즌 27승, 한국시리즈 4승으로 총 31승을 했다.


<참고> 박찬호보다 극적이었던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MBC 스페셜에서 최초의 가계약서를 보여준 이유는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행될 수도 없는 가계약 내용을 왜 따지는 것일까?

노예근성의 한심한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하찮은 계약으로 격하해야 했기 때문이다. 大일본제국의 최정상급 선수들도 꿈에서 조차 언감생심이었던 80년대 메이저리그 계약을 한국인이 했다는 역사가 기록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세계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망할 나라 본 적이 있는가?




선동열은 KBO 역대 최고도, 국보급 투수도 아니었다! yakujoa


선동열에게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은 86년이었다.

86년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262.2이닝 (0.99)


24승 262.2이닝 0.99 방어율 때문에 선동열이 국보급 투수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한 기록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과 1개월만에 의심을 받게 된다. 그 시절 야구팬들이 아무리 무지했어도 최소한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6년 9월에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프로야구 정규시즌은 조기에 종료되었다. 선동열은 9월 13일 청용전(7이닝 구원승)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하는데,

무려 35일간의 넉넉한 휴식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다. 1차전에서는 9이닝 3실점을 했고, 4차전에서는 6이닝 2실점을 하면서 패전 직전까지 갔으나 팀 타선의 도움으로 겨우 패전을 면하게 된다.

상대팀이었던 삼성은 선동열이 선발 등판한 경기(1, 4차전)를 다 잡아 놓고도 연장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는데, KBO가 새롭게 적용한 몰상식한 제도 때문에 종합승률 1위를 했음에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5차전 내내 두산과 피말리는 접전을 벌였고, 단 1일 휴식후에 시작된 한국시리즈에서 누적된 피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다 잡은 경기를 놓쳤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진짜 실력은 포스트시즌 기록


한국시리즈 이후에 84년 최동원보다 떨어지는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많은 야구팬들이 그러한 평가에 주목하게 된다. 80년대 가장 치열했던 시즌이 84년이었고, 더구나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막장팀 롯데에서 27승을 기록한 반면 선동열은 삼성과 함께 최강팀이었던 86년 해태에서 24승을 기록했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4승으로 막장팀 롯데를 우승시켰다는 점에서 야구 이해도가 떨어졌던 당시 야구팬들도 투수의 여러 기록들 중에서 방어율이 진정 신뢰할만한 기록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어율이 가상수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이고, 가상수치(방어율)보다 실적(이닝+승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동열에게 87시즌은 정말 중요했다.

87년 - 31경기 14승 2패 6세이브 162이닝 (0.89)


87년 기록을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세부 내용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가, 더구나 이닝이터 평균이 200이닝이 넘었던 시절에 고작 162이닝을 던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등판일지와 구원승 내역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었다.


14승 중에 무려 9승이 구원승이었다. 그리고 8, 9월에 구원승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4월에 7경기, 5월에 4경기, 6월에 1경기, 7월에 3경기, 8월에 4경기, 그리고 9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시즌 후반기에만 무려 12경기에 등판하여 (여름내내 푹 쉬고 9월부터) 지쳐있는 타자들을 상대해서 그럴듯한 기록만을 남긴 시즌이 87년이었다.

87년 등판일지가 6월부터 한심해진 이유는,  5월 16일에 그 유명했던 최동원과의 연장 15회 마지막 맞대결 이후에 뻗었기 때문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최동원과의 맞대결 관련 내용이 파렴치한 선빠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 최동원, 선동열 맞대결이 원래 4차전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은 3차전(10월 10일) 1:1에서 8회 1사 1루에 구원 등판하여 1볼넷과 1안타를 허용하고 강판당했고(0이닝 2자책점),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10월 22일)에 등판하여 1.2이닝 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87년 포스트시즌 기록의 전부였다.

시즌 막판에 그럴듯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했고,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10월 3일 빙그레전에서 5이닝을 던진 이후에 6일간의 휴식은 선동열에게 턱없이 부족한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87년 포스트시즌 이후에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사실상 폐기된다. 하지만 88년에도 해태팬들과 언론의 선동열 찬양에는 변함이 없었다. (87년 대통령선거 이후에) 해태팬들에게 선동열은 이유 없는 희망이었고, 따라서 언론에게 선동열은 전략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88년 - 31경기 16승 5패 10세이브 178.1이닝 (1.21)


88년부터 해태는 독보적인 강팀이 되었고, 그래서 선동열의 88년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독보적인 강팀에서도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했고 200이닝(80년대 이닝이터 평균) 투구가 불가능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긴 있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벽한 피칭으로 최초의 선발승을 기록했던 것이다(7.1이닝 무실점).

9월에는 88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즌이 조기에 종료되었고, 선동열은 8월 25일 두산전(6이닝 구원승) 이후에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했다. 무려 54일간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선동열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선동열이 해태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무려 8번의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2번이상 선발 등판한 시리즈는 86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고(1, 4차전), 완벽한 피칭으로 선발승을 기록한 시리즈는 88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다. 무려 1개월 이상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의 야구팬들이 믿기 힘들겠지만, 선동열은 80년대 KBO에서도 4일 휴식 로테이션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88년은 선동열이 기껏해야 15승 투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시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승수가 중요한 이유는,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이었지만, 하위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추세(최강팀 에이스가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15승 투수)가 계속되었다면 언론에서 아무리 뻥튀기를 해도 현재의 야구팬들은 선동열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84년부터 87년까지 최강팀이었던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의 기록을 보더라도,

(84년) 215이닝 19승 - (85년) 269.2이닝 25승 - (86년) 196.2이닝 16승 - (87년) 193.1이닝 23승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선동열은 86년 반짝 활약 이후에 88년까지 평범한 에이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89년에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89년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이닝 (1.17)


169이닝을 던지고 어떻게 21승이 가능했단 말인가? 일단 구원승 내역부터 보자.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89년에도 선동열은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한 투수였지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20승 투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면서 선동열에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선동열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0이닝 (1.17)
이강철 - 36경기 15승 8패 5세이브 195.1이닝 (3.23)



이렇게 되면 도대체 누가 에이스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 진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선동열에게 절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스포츠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 유명한 "선동열은 애기야 애기"


[프로야구 주간방담] 1990년 3월 14일 스포츠서울

하와이에 전훈중인 쌍방울은 어린이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탄 것과 같은 짜릿한 추억을 안게 됐습니다. 지난 6일 하와이 대학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동국대 감독 시절 미국 대학팀들과 게임을 해 보았던 김인식 감독은 "그까짓 단일대학 쯤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뉴욕 메츠의 선발 투수 시드 페르난데스가 선발로 올라온 겁니다. 페르난데스라면 지난해 14승 4패로 팀내 최고 성적을 올렸던 투수로 마침 미 프로야구가 '직장폐쇄'중이어서 모교에서 훈련중이었습니다. 결과는 3회까지 무안타 5삼진. 우선 덩치(185cm 104kg)에 놀라고 스피드에 놀란 김감독은 "선동열은 거기에 비하면 애기야 애기"라고 혀를 내두릅디다.


그렇다면 선동열은 90시즌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90년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닝이터 평균 이닝수에 근접하는 변화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승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닝수만 늘어났을 뿐이지 세부내역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로테이션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하다 보니 로테이션을 지킬 수가 없었고, 구원승 비중을 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에이스들의 구원승 비중이 높은 이유는, 선수층이 부실했기 때문에 에이스들이 불규칙적인 등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정규시즌 경기수에 비해 출전 경기수와 이닝수, 그리고 구원승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사를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최강팀 에이스였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했으니 이닝수는 미달일 수밖에 없었고,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발승 - 이닝수 - 방어율]이 기형적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동열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강철 - 44경기 16승 10패 5세이브 220.2이닝 (3.14)



이강철과의 기록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89, 90시즌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선동열이 아니었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태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이강철!" 이에 자극을 받은 선동열은 91년에 진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91년 - 35경기 19승 4패 6세이브 203이닝 (1.55)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에이스다웠던 시즌은 91년이 아닌가 싶다. 선발승이 15승이었고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도 훌륭했다. 91년은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정상적인 기록이 만들어진 시즌이었다.


사실 선동열의 86년 기록도 문제가 많았다. 부실한 선수층에서 7구단(빙그레)이 창단되면서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고, 전/후기리그 방식의 경기일정은 강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각 리그 후반(6, 9월)에는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에서 탈락한 팀들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상위팀 투수들은 비교적 쉽게 승수를 올릴 수 있었고, 기록 관리에서도 월등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86년 선동열의 3연속 완봉승 기록도 9월에 경쟁에서 탈락한 팀을 상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하위팀 투수들은 기록에서도 말도 못하게 손해를 보았다.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방어율 관리는 꿈도 못 꾸었다.

<참고> 1986/87년의 특급 에이스 선동열


만약 선동열이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선발승 15승 이상, 200이닝 이상 투구, 1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유지했다면 누구도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선동열은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기 전까지 최강팀에서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15승 투수에 불과했고 이닝수는 미달이었다. 이강철 덕분에 일시적으로 20승 투수로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2시즌(90~91년) 연속 무리한(?) 투구를 하면서 선발투수 생명도 끝나게 된다.

선동열이 96년에 NPB에 진출해서 고전했던 이유는, NPB 수준이 월등히 높아서 KBO 역대 최고 투수가 고전한 것이 아니었다. 선동열은 KBO 역대 최고 투수도 아니었고, 최강팀에서 방어율에만 집착하는 몰상식한 야구만 하다 반대의 환경에서 실체가 드러난 것 뿐이었다.




[ 주간야구 88년 9월 14일(수) 발행 ] 선동열(만 25세) 인터뷰 중에서



그리고 선동열이 있었기 때문에 해태가 우승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잘못 되었다. 선동열이 해태 우승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에이스로 활약한 기간동안(86 ~ 9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기여도는 미미한 수준이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있어서도 86년을 제외하면 비중있게 기여한 시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동열이 NPB에 진출한 이후에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이종범은 해태를 2년 연속(96~97년)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동열의 해태가 아니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선동열 없이도 해태는 얼마든지 강팀이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아버지의 MBC 인터뷰 증언



 


1 2 3 4 5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