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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은 KBO 역대 최고도, 국보급 투수도 아니었다! yakujoa


선동열에게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가 최초로 사용된 시점은 86년이었다.

86년 - 39경기 24승 6패 6세이브 262.2이닝 (0.99)


24승 262.2이닝 0.99 방어율 때문에 선동열이 국보급 투수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한 기록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과 1개월만에 의심을 받게 된다. 그 시절 야구팬들이 아무리 무지했어도 최소한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6년 9월에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프로야구 정규시즌은 조기에 종료되었다. 선동열은 9월 13일 청용전(7이닝 구원승)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하는데,

무려 35일간의 넉넉한 휴식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다. 1차전에서는 9이닝 3실점을 했고, 4차전에서는 6이닝 2실점을 하면서 패전 직전까지 갔으나 팀 타선의 도움으로 겨우 패전을 면하게 된다.

상대팀이었던 삼성은 선동열이 선발 등판한 경기(1, 4차전)를 다 잡아 놓고도 연장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는데, KBO가 새롭게 적용한 몰상식한 제도 때문에 종합승률 1위를 했음에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5차전 내내 두산과 피말리는 접전을 벌였고, 단 1일 휴식후에 시작된 한국시리즈에서 누적된 피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다 잡은 경기를 놓쳤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진짜 실력은 포스트시즌 기록


한국시리즈 이후에 84년 최동원보다 떨어지는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많은 야구팬들이 그러한 평가에 주목하게 된다. 80년대 가장 치열했던 시즌이 84년이었고, 더구나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막장팀 롯데에서 27승을 기록한 반면 선동열은 삼성과 함께 최강팀이었던 86년 해태에서 24승을 기록했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4승으로 막장팀 롯데를 우승시켰다는 점에서 야구 이해도가 떨어졌던 당시 야구팬들도 투수의 여러 기록들 중에서 방어율이 진정 신뢰할만한 기록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방어율이 가상수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구는 승/패를 구별하는 팀-워크 스포츠"이고, 가상수치(방어율)보다 실적(이닝+승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동열에게 87시즌은 정말 중요했다.

87년 - 31경기 14승 2패 6세이브 162이닝 (0.89)


87년 기록을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세부 내용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가, 더구나 이닝이터 평균이 200이닝이 넘었던 시절에 고작 162이닝을 던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등판일지와 구원승 내역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었다.


14승 중에 무려 9승이 구원승이었다. 그리고 8, 9월에 구원승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4월에 7경기, 5월에 4경기, 6월에 1경기, 7월에 3경기, 8월에 4경기, 그리고 9월 2일부터 10월 2일까지 시즌 후반기에만 무려 12경기에 등판하여 (여름내내 푹 쉬고 9월부터) 지쳐있는 타자들을 상대해서 그럴듯한 기록만을 남긴 시즌이 87년이었다.

87년 등판일지가 6월부터 한심해진 이유는,  5월 16일에 그 유명했던 최동원과의 연장 15회 마지막 맞대결 이후에 뻗었기 때문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최동원과의 맞대결 관련 내용이 파렴치한 선빠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 최동원, 선동열 맞대결이 원래 4차전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은 3차전(10월 10일) 1:1에서 8회 1사 1루에 구원 등판하여 1볼넷과 1안타를 허용하고 강판당했고(0이닝 2자책점),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10월 22일)에 등판하여 1.2이닝 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87년 포스트시즌 기록의 전부였다.

시즌 막판에 그럴듯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했고,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10월 3일 빙그레전에서 5이닝을 던진 이후에 6일간의 휴식은 선동열에게 턱없이 부족한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87년 포스트시즌 이후에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는 사실상 폐기된다. 하지만 88년에도 해태팬들과 언론의 선동열 찬양에는 변함이 없었다. (87년 대통령선거 이후에) 해태팬들에게 선동열은 이유 없는 희망이었고, 따라서 언론에게 선동열은 전략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88년 - 31경기 16승 5패 10세이브 178.1이닝 (1.21)


88년부터 해태는 독보적인 강팀이 되었고, 그래서 선동열의 88년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독보적인 강팀에서도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했고 200이닝(80년대 이닝이터 평균) 투구가 불가능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긴 있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벽한 피칭으로 최초의 선발승을 기록했던 것이다(7.1이닝 무실점).

9월에는 88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즌이 조기에 종료되었고, 선동열은 8월 25일 두산전(6이닝 구원승) 이후에 10월 19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했다. 무려 54일간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선동열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선동열이 해태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무려 8번의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2번이상 선발 등판한 시리즈는 86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고(1, 4차전), 완벽한 피칭으로 선발승을 기록한 시리즈는 88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했다. 무려 1개월 이상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의 야구팬들이 믿기 힘들겠지만, 선동열은 80년대 KBO에서도 4일 휴식 로테이션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88년은 선동열이 기껏해야 15승 투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시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승수가 중요한 이유는,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던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이었지만, 하위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추세(최강팀 에이스가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15승 투수)가 계속되었다면 언론에서 아무리 뻥튀기를 해도 현재의 야구팬들은 선동열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84년부터 87년까지 최강팀이었던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의 기록을 보더라도,

(84년) 215이닝 19승 - (85년) 269.2이닝 25승 - (86년) 196.2이닝 16승 - (87년) 193.1이닝 23승

80년대 KBO에서 최강팀 에이스에게 15승은 당연한 실적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선동열은 86년 반짝 활약 이후에 88년까지 평범한 에이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89년에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89년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이닝 (1.17)


169이닝을 던지고 어떻게 21승이 가능했단 말인가? 일단 구원승 내역부터 보자.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89년에도 선동열은 여전히 선발 10승이 불가능한 투수였지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20승 투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면서 선동열에게 구원승의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선동열 - 36경기 21승 3패 8세이브 169.0이닝 (1.17)
이강철 - 36경기 15승 8패 5세이브 195.1이닝 (3.23)



이렇게 되면 도대체 누가 에이스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 진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선동열에게 절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스포츠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 유명한 "선동열은 애기야 애기"


[프로야구 주간방담] 1990년 3월 14일 스포츠서울

하와이에 전훈중인 쌍방울은 어린이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탄 것과 같은 짜릿한 추억을 안게 됐습니다. 지난 6일 하와이 대학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동국대 감독 시절 미국 대학팀들과 게임을 해 보았던 김인식 감독은 "그까짓 단일대학 쯤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뉴욕 메츠의 선발 투수 시드 페르난데스가 선발로 올라온 겁니다. 페르난데스라면 지난해 14승 4패로 팀내 최고 성적을 올렸던 투수로 마침 미 프로야구가 '직장폐쇄'중이어서 모교에서 훈련중이었습니다. 결과는 3회까지 무안타 5삼진. 우선 덩치(185cm 104kg)에 놀라고 스피드에 놀란 김감독은 "선동열은 거기에 비하면 애기야 애기"라고 혀를 내두릅디다.


그렇다면 선동열은 90시즌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90년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닝이터 평균 이닝수에 근접하는 변화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승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닝수만 늘어났을 뿐이지 세부내역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로테이션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하다 보니 로테이션을 지킬 수가 없었고, 구원승 비중을 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에이스들의 구원승 비중이 높은 이유는, 선수층이 부실했기 때문에 에이스들이 불규칙적인 등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정규시즌 경기수에 비해 출전 경기수와 이닝수, 그리고 구원승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사를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최강팀 에이스였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만 등판했으니 이닝수는 미달일 수밖에 없었고,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발승 - 이닝수 - 방어율]이 기형적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동열 - 35경기 22승  6패  4세이브 190.1이닝 (1.13)
이강철 - 44경기 16승 10패 5세이브 220.2이닝 (3.14)



이강철과의 기록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89, 90시즌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선동열이 아니었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태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이강철!" 이에 자극을 받은 선동열은 91년에 진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91년 - 35경기 19승 4패 6세이브 203이닝 (1.55)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에이스다웠던 시즌은 91년이 아닌가 싶다. 선발승이 15승이었고 이닝이터 평균 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도 훌륭했다. 91년은 선동열 커리어에서 가장 정상적인 기록이 만들어진 시즌이었다.


사실 선동열의 86년 기록도 문제가 많았다. 부실한 선수층에서 7구단(빙그레)이 창단되면서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고, 전/후기리그 방식의 경기일정은 강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각 리그 후반(6, 9월)에는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에서 탈락한 팀들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상위팀 투수들은 비교적 쉽게 승수를 올릴 수 있었고, 기록 관리에서도 월등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86년 선동열의 3연속 완봉승 기록도 9월에 경쟁에서 탈락한 팀을 상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하위팀 투수들은 기록에서도 말도 못하게 손해를 보았다.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방어율 관리는 꿈도 못 꾸었다.

<참고> 1986/87년의 특급 에이스 선동열


만약 선동열이 에이스로 활약한 6년동안(86 ~ 91년) 선발승 15승 이상, 200이닝 이상 투구, 1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유지했다면 누구도 "국보급 투수"라는 수식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선동열은 이강철이 해태에 입단하기 전까지 최강팀에서 구원승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15승 투수에 불과했고 이닝수는 미달이었다. 이강철 덕분에 일시적으로 20승 투수로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2시즌(90~91년) 연속 무리한(?) 투구를 하면서 선발투수 생명도 끝나게 된다.

선동열이 96년에 NPB에 진출해서 고전했던 이유는, NPB 수준이 월등히 높아서 KBO 역대 최고 투수가 고전한 것이 아니었다. 선동열은 KBO 역대 최고 투수도 아니었고, 최강팀에서 방어율에만 집착하는 몰상식한 야구만 하다 반대의 환경에서 실체가 드러난 것 뿐이었다.




[ 주간야구 88년 9월 14일(수) 발행 ] 선동열(만 25세) 인터뷰 중에서



그리고 선동열이 있었기 때문에 해태가 우승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잘못 되었다. 선동열이 해태 우승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에이스로 활약한 기간동안(86 ~ 9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기여도는 미미한 수준이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있어서도 86년을 제외하면 비중있게 기여한 시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동열이 NPB에 진출한 이후에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이종범은 해태를 2년 연속(96~97년)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동열의 해태가 아니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선동열 없이도 해태는 얼마든지 강팀이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참고> 선동열 아버지의 MBC 인터뷰 증언



 


83년 장명부는 알려진 것처럼 엽기적인 투수였을까? yakujoa


82년에 KBO가 출범했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대한야구협회와의 갈등이었다. 실업야구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KBO 출범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있었고, 지역 연고제 선수 구성 방식을 고수한 KBO의 정책은 (추측이지만) 현대와 금호가 이탈하는 원인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대구/경북 지역은 고교 야구의 전성기였고, 이 선수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삼성과 서울의 청용은 엔트리 구성에 문제가 없었으나 다른 지역은 문제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인천과 광주는 심각했다. 15명 확보도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지식인들로부터 (전두환 정부)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라는 오해까지 받았기 때문에 야구인들 조차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참고> 81년 8월까지 프로야구(KBO) 출범 계획은 없었다.


그 때문에 82년 우승은 삼성과 청용이 다툴 것으로 전망되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82년 개막전이 [삼성 - 청용]인 이유이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던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 더블A 출신 박철순의 등장으로 중위권 전력의 두산이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82년은 80경기 일정이었고 전/후기리그 각각 40경기였는데, 박철순은 전기리그에서 3월 28일 첫 등판을 시작으로 6월 22일 마지막 등판까지 23경기에 등판하여 18승 2패 3세이브, 17연승의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며 두산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불규칙적인 연투는 단 1년만으로도 선수생명을 끝나게 할 수 있는데, 박철순은 전기리그 내내 불규칙적인 등판을 반복했고, 결국 허리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후기리그에서는 여유있는 등판을 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 또 무리를 하면서 200이닝 투구를 기록한 시즌은 82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83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욕은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이어졌고, 박철순의 허리부상은 심각한 상태가 된다.

 


박철순의 등장으로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중위권 전력의 두산이 82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변은 83년에도 이어지는데, 그 중심에는 장명부가 있었다.

추측이지만, 장명부는 두 가지 착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 NPB 에이스 출신인 자신(장명부)이 더블A 출신 박철순보다 기량면에서 월등하다는 착각
2. 박철순이 40경기에서 18승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자신(장명부)은 50경기에서 20승이 가능하다는 착각



장명부는 4월 3일 첫 등판을 시작으로 5월 26일까지 31경기에서 17경기에 등판하여 13승 3패 1세이브를 거두었고, 남은 19경기에서 9~10경기에 등판하여 +7~8승이 가능한 20~21승 페이스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5월 26일 해태전이었다.

해태는 1위 삼미와 1경기차였고, 그래서 광주 홈경기는 해태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해태는 경기 초반에 6실점을 하면서 장명부의 무난한 승리로 예상되었다. 83시즌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팀 모두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더구나 5월 들어 도저히 공략 불가능해 보이던 장명부를 놀랍게도 해태 타자들이 공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기 중반부터 2득점, 2득점, 그러더니 8회에 1점을 추가하면서 5:6까지 따라 붙었던 것이다.

중계방송을 KBS1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9시 뉴스 때문에 중계방송이 중단되자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인지 KBS2에서 중계방송을 계속하게 되었고(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전파사 TV 앞에 묶여 있었다),

해태가 9회말에 6:6 동점을 만들면서 야구팬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해태는 10회초에 실책으로 자멸하게 되는데, 중요한 사실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장명부가 맞아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기리그 남은 경기에서 9~10경기에 등판하여 +7~8승이 가능했던 장명부의 페이스는 이 경기 이후에 급격한 하락세을 보이면서 9경기에 등판하여 +4승에 그친다. 결국 해태는 30승 1무 19패로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삼미는 27승 23패로 2위를 하는데,

만약 장명부의 최초 계획대로 20승 이상을 했다면 해태의 승/패에도 최소한 1경기는 영향을 끼치므로 해태는 29승 1무 20패로 2위, 삼미는 30승 20패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명부는 무엇을 착각했나?

1. NPB 에이스 출신인 장명부는 더블A 출신 박철순보다 기량면에서 한 수 아래였다.
2. 박철순은 40경기에서 18승이 가능한 기량이었지만 장명부는 50경기에서 20승이 불가능한 기량이었다.



박철순이 18승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한국 타자들이 82년 내내 박철순에게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장명부 상대로는 익숙해질 수 있었고 공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기량차이였다.

박철순의 주무기(포심/커브/팜볼)는 타이밍이 전부 달랐고, 임기응변 능력이 떨어지는 한국 타자들이 1년 이내에 적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장명부는 후기리그에서 전략을 바꾸게 된다. 해태 이상윤이 전기리그에서 사용한 전략이었다.


개막이후 2패만을 기록했던 이상윤은 4월 21일에 첫 승을 올린 이후에 5월 25일에 완봉승을 거두면서 6승 5패 1세이브로 해태의 에이스로 부각되었고, 이후부터 김응룡 감독은 리드하거나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는 무차별적으로 이상윤을 등판시키는데,

5월 31일 구원승을 시작으로 6월 22일 완봉승을 거두면서 해태의 전기리그 우승을 사실상 확정짓는데, 이상윤은 불과 23일동안 9승 1세이브를 기록한다(4월 21일 첫 승을 시작으로 6월 22일 마지막 완봉승까지 63일동안 15승 5패 1세이브).


[ 83년 6월 21일 경향신문 ]



"위에서 떨어지는 드롭볼과 스피드는 국내 최고" (드롭볼은 포크볼을 의미하는 당시 표현이다.)


83년 이상윤의 구위는 대단했고, 기사에는 "150km를 능가"한다고 나왔지만 정확한 스피드는 알 수 없다. 당시 스피드건으로 결정구 스피드는 145km에서 형성되었고 현재 사용되는 공식 스피드건으로는 140km 중/후반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시리즈에서도 6일동안 3경기에 등판하여 20이닝을 던졌고 1승 1세이브로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박철순과는 달리 이상윤은 2년연속 무리한 투구를 하는데(40경기 이상 등판 + 200이닝 이상 투구), 그로 인해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면서 평범한 통산 기록을 남기게 된다.


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의 예상에 이런 표현이 많이 사용되는데, [ 2강 3중 2약 ] 여기서 현재의 "중"의 의미와 KBO 초창기의 "중"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KBO 초창기의 "중"은 우승이 불가능하다는 "약"의 의미이다. 전력 불균형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해태는 82년에만 하위권 전력이었고, 83 ~ 85년은 중위권 전력, 86/87년은 삼성과 함께 최강팀 전력이었다. 그리고 88년부터 독보적인 최강팀이 된다. 이상윤의 통산 기록에서 80년대 KBO의 전력 불균형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84년에 이상윤은 무려 40경기에 등판하여 211이닝을 던졌으나 겨우 10승을 기록했다. 해태가 강팀이 된 86년에는 21경기에 등판하여 115이닝을 던지고 10승을 기록했고, 독보적인 강팀이 된 88년에는 30경기에 등판하여 137이닝을 던지고 무려 16승을 기록한다.

또 다른 사례로 김시진, 임호균이 있다. 이닝이팅 능력에서만 김시진이 월등했고 기량면에서는 사실상 동급의 투수였다. 그런데 이런 두 투수가 KBO 출범 이후에 한 명은 강팀에서 또 다른 한 명은 약팀만을 전전하게 된다(김시진, 임호균의 83 ~ 87년 기록).


  


85년 김시진의 25승, 86년 선동열의 24승은 가치있는 기록이 아니다. 중/하위권 전력의 팀에서는 15승도 불가능했다. 우승이 불가능했던 중위권 전력의 두산과 해태가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박철순과 이상윤의 희생이었다. 우승의 대가는 에이스의 선수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우승은 에이스의 선수생명과 바꿀만한 정도의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그 시절의 한국인들은 정말 가난했다. 약자가 강자를, 가난한 자가 부자를 상대로 최후의 승자가 되는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그것을 보여주었고, 가난한 한국인들은 프로야구를 통해서 희망을 보았다. 선수생명과 바꿀만한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럼, 다시 장명부의 83년 후기리그에 대해서 살펴보자.

장명부는 후기리그에서 이상윤이 그랬던 것처럼 무차별적인 등판을 하는데, 그 때는 너무 늦었다!

장명부는 후기리그에서 7월 10일 완투승을 시작으로 9월 27일 마지막 등판에서 완봉승으로 30승을 장식할 때까지 80일동안 무려 34경기에 등판했으나 13승에 그친다. 타자들에게 익숙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구위까지 하락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리그에 무리하여 20승을 거두고, 후기리그에서는 여유있는 등판으로 30승을 달성한 이후에 체력적인 여유를 갖고 한국시리즈에 대비하려 했던 장명부의 최초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83년 장명부의 전/후기리그 주요 기록 ]

전기리그 - 26경기 17승 7패 1세이브 215.2이닝
후기리그 - 34경기 13승 9패 5세이브 211.2이닝

 


야구, 축구처럼 규모가 큰 종목의 프로스포츠 리그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1. 중진국 이상의 경제력
2. 5천만명 이상의 인구
(국토 면적에 따라 유동적)
3. 빅-마켓 프렌차이즈 (야구, 축구에 미쳐있는 대도시)


전세계에 경쟁력있는 야구, 축구리그가 소수에 불과한 이유가 위의 3가지 조건을 전부 갖춘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조건은 바로 3번이다. 1, 2번 조건을 갖추었어도 3번 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에는 리그를 정착시킬 수 없다.

프로스포츠 리그가 만들어지면 처음 몇 년 동안은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KBO는 1번 조건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출범했음에도 조기에 빅-마켓 프렌차이즈를 확보할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프로야구는 침체에 빠졌으나 92년 롯데의 우승을 시작으로 90년대 중반에는 경제력까지 갖추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90년대 후반에는 경제 위기를 시작으로 프로야구는 또 다시 침체에 빠지게 되지만 부산의 야구 열기를 발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프로스포츠와 관련하여 이런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열기"

프로스포츠에서의 "열기"는 바이러스가 옮기는 전염병과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열기" 바이러스의 근원지가 존재해야 하며, 근원지가 크면 클수록 "열기" 바이러스의 폭발력도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열기"의 근원지를 "빅-마켓 프렌차이즈"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산은 어떻게 "열기"의 근원지가 되었을까?
70년대 고교야구 인기 때문에? 아니면 70년대 위성 중계를 통해서 NPB를 시청했던 극소수의 부산 시민들 때문에?


[ 83년 5월 16일 경향신문 ]



하위에 맴도는 두 팀의 대결인지라 팬들의 관심도 적은데다 홈팀 롯데측의 홍보활동이 너무나 뒤져 관중동원에서 축구에 완패했다.


서울은 특성상 빅-마켓 프렌차이즈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한국에서 빅-마켓 프렌차이즈가 될 수 있는 대도시는 부산이 유일했고, 롯데는 KBO 출범이후부터 바닥만을 사수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83년에는 프로축구가 출범했다. 설상가상으로 멕시코 청소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면서 부산은 벼랑끝에 놓이게 된다.


[ 83년 6월 13일 경향신문 ]




롯데가 정신차리지 않는 이상 프로야구의 예정된 몰락은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전성기의 최동원에게는 막장팀 롯데를 우승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어깨부상 후유증과 메이저리그 진출 좌절로 의욕을 상실한 최동원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참고> 양키스, 다저스를 물리치고 최동원을 스카웃 한 블루제이스


[ 83년 9월 1일 동아일보 ]



부산 관중들은 8회 롯데가 무려 5점을 뺏기자 흥분, 병을 던지며 『부산에 오지말라, 최동원을 내보내라』
강병철 롯데 감독은 『최동원이 지난 25일 경기후 팀을 이탈, 자체징계중이라 등판 시킬 수 없었다.』



80년대 내내 롯데가 막장팀의 지위를 고수했다면, 단언하건데 현재의 야구도시 부산은 없다!

92년에도 롯데는 우승을 하지만 그 우승이 최초의 우승이었다면 그 때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승을 한다고 비인기팀이 인기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단순히 우승을 한다고 해당 도시가 야구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도시를 특정 종목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를 미치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84년에 부산 전체를 미치게 만든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82년은 15명도 안되는 엔트리로 시작한 팀이 2개팀이나 되었고, 83년에도 형식적으로 머릿수를 채웠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82년 백인천과 박철순, 83년 장명부와 이상윤의 엽기적인 기록은 그래서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84년부터 KBO는 달라지게 된다. 엔트리 구성이 완료되면서 리그 경쟁력이 만들어진 첫 시즌이 된다. 스타급 선수들도 주전 경쟁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리그 경쟁력이 만들어진 첫 시즌이었기 때문에 정말 치열했다. 리그 최고 투수들의 기록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김시진 - 39경기 19승 11패 2세이브 215.0이닝 (3.18)
김일융 - 38경기 16승 10패 3세이브 222.0이닝 (2.27)
장명부 - 45경기 13승 20패 7세이브 261.2이닝 (3.30)
이상윤 - 40경기 10승 13패 8세이브 211.2이닝 (2.85)


하지만 최동원은 예외였다. 전성기의 90% 가까이 기량을 회복한 최동원은 막장팀 롯데를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참고> 슈우트(투심, 싱커)의 달인이었던 84년의 최동원


참고로 84년 롯데가 막장팀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4년 롯데는 막장팀이 맞다. 쉽게 알아낼 수 있다. 83년에 9승에 불과했던 최동원이 84년에 부활하여 27승을 거두면서 롯데가 우승한 것이므로 84년에도 최동원이 부활하지 못했다는 가정을 하여 승/패 계산을 다시 하면 된다. 즉 84년에 최동원이 14승을 했다고 가정하면 된다. 27 / 2 = 13.5 (14승)

83년 9승에 비해 5승을 더 한 것이므로 결코 무리한 가정이 아니며, 롯데 전적에서 13승을 제거하고 13패를 추가하면 되는데, 여기서 상위 3개팀에는 3승씩, 그리고 중/하위 2개팀에는 2승씩을 나누어주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팀 순위가 만들어진다.

1. 두산 - 61승 38패 1무  (+3승)
2. 삼성 - 58승 42패 ---   (+3승)
3. 청용 - 54승 45패 1무  (+3승)
4. 해태 - 45승 52패 3무  (+2승)
5. 삼미 - 40승 57패 3무  (+2승)

6. 롯데 - 37승 61패 2무 (-13패)


놀랍게도 84년 롯데는 막장팀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실 84년 롯데의 우승은 그 어떤 가설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장명부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이라는 평가를 받은 김일융 조차도 고전을 했던 시즌이 84년이었다. 그 만큼 팬들의 관심도 대단했고, 따라서 롯데의 기적적인 우승은 부산 전체를 미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통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박철순, 장명부, 이상윤, 최동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다를 것이다.

80년대 프로야구가 현재에 와서 심각하게 왜곡된 이유는, 그 시절 야구팬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실력있는 매니아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정확한 정보를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야구탐사] 최동원-선동열 맞대결, 원래 5차전이었다! yakujoa



[최동원-선동열] 맞대결을 다룬 기사에서 아래 내용은 오류와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다.


숨겨진 또 다른 맞대결, 1987년 4월 12일 혈투

지금껏 알려지기로 최동원-선동열 맞대결은 3차전에서 끝을 맺었다. 역대 전적 1승1무1패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기록으로 기억돼 있다. 그러나 두 투수의 숨겨진 맞대결은 하나가 더 있었다.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이날 롯데 선발은 최동원, 해태 선발은 고 김대현이었다. 전주고-원광대를 졸업한 프로 2년 차 김대현은 당시 무명 투수였다. 1986년 데뷔 첫해 2패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은 그런 김대현을 “싹수가 보이는 투수”로 평가하며 1987년 스프링캠프 때부터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최동원과의 맞대결에 김대현을 내보낸 것도 “대투수와 붙어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김응룡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김대현은 1회 1사를 기록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유가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김대현의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선발투수는 최소 한 타자 이상을 상대하고 물러나야 했기에 김 감독은 김대현이 1아웃을 잡자 곧바로 투수를 바꿨다. 문제는 바뀐 투수가 선동열이라는 데 있었다.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선동열을 지켜보는 관중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선발투수는 이미 소진된 후였고, 롱릴리프로 등판할 투수라곤 선동열밖에 없었다.

....................
[ 2011년 12월 23일 기사에서 발췌 ]


먼저 오류 부분부터 지적하자면,

(오류) 두 투수의 숨겨진 맞대결은 하나가 더 있었다.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정정) 두 투수의 숨겨진 최초의 맞대결은 1985년 7월 31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85년 7월 26일 광주에서 벌어진 [롯데 - 해태]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날 선동열은 재일동포 김정행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0:3으로 완투패를 기록한다. 그리고 4일 휴식후인 31일에 부산 롯데전에 선발로 등판해야 하는데,

등판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85년 롯데는 공격력이 무려 3~4위권 수준이었다(6개팀). 최동원이 롯데에서 활약한 기간동안 가장 강력했던 롯데가 바로 85년 롯데였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후기리그 7월 30일까지 롯데는 14승 5패로 1위였고, 해태는 10승 12패로 5위였기 때문이다.

김응룡 감독이 고심했었다는 정황이 31일 경기에 그대로 드러난다. 오히려 페이스가 떨어져 있는 강만식을 선발 등판시켰고, 2회까지 호투하던 강만식은 3회에 제구력 난조로 1사 만루 위기를 자초하면서 선동열에게 공을 넘기게 되는데,


선동열은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면서 3실점했고, 6회에 추가 1실점을 하면서 5.2이닝 4실점 1자책점을 기록한다. 주목할 점은 4일 휴식 등판이었다는 사실이다. 80년대 KBO에서 4일 휴식은 충분한 휴식이었고, 따라서 선동열의 패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선동열은 선발로 등판했어야 했고, 6회에 선동열의 자책점이 존재하며 해태가 6회까지 무득점이었다는 점에서, 4점차로 벌어진 이후에 해태가 7회에 득점한 2점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기사 제목을 포함하여 오류 부분은 정정되어야 한다.


최동원-선동열 맞대결, 원래 5차전이었다.

숨겨진 두 개의 맞대결, 1985년 7월 31일과 1987년 4월 12일

지금껏 알려지기로 최동원-선동열 맞대결은 3차전에서 끝을 맺었다. 역대 전적 1승1무1패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기록으로 기억돼 있다. 그러나 두 투수의 숨겨진 맞대결은 두 개가 더 있었다. 1985년 7월 31일과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태-롯데전이었다.



그리고 거짓으로 구성된 부분을 지적하자면,

(여기부터) 최동원과의 맞대결에 김대현을 내보낸 것도 “대투수와 붙어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김응룡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 선발투수는 이미 소진된 후였고, 롱릴리프로 등판할 투수라곤 선동열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위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겠으나, 당시의 정황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김응룡 감독의 "꼼수"였다. 선발투수는 처음부터 위장이었고, 선동열의 등판은 계획되어 있었다.

그 시절 야구팬들 수준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21세기에 그런 꼼수를 썼다가는 평생 들을 비난의 절반 이상을 하루에 다 듣게 될 것이다. 왜 그런지 87년 4월로 돌아가보자. 12일까지의 선동열 등판일지와 해태 경기(일정/전적)에서 진실을 유추할 수 있다.


87년은 7개구단이었고 7일(화), 8일(수)에는 해태 경기가 없었다. 9~10일에는 광주 청용전, 그리고 11~12일에는 부산 롯데전이 예정되어 있었고 13일은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경기일정이 없었다.

4월 9일 광주 청용전에서 선발 차동철이 5.2이닝을 던지고 승리 투수가 되었고, 선동열은 3.1이닝을 던지고 세이브를 기록한다. 선동열의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고, 5일 광주 삼성전에서 5.1이닝 구원승을 거둔 이후였다. 그리고 해태는 10일에 시즌 첫 패배를 기록한다.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9회까지 1:1의 투수전이었고 11일 선발 예정이었던 김정수가 9회에 등판해서 2이닝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4월 개막이후 9일까지 3연승을 달리던 해태는 3일간(6~8일)의 충분한 휴식이 있었고, 10일 첫 패배 이후에 11일 롯데전에서 0:11로 대패하면서 3연패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3일은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경기일정이 없었다.


휴식일 전날, 3연패 직전의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김응룡 감독의 이런 배려가 가능했을까?
최동원과의 맞대결에 김대현을 내보낸 것도 “대투수와 붙어야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김응룡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김응룡 감독은 스케일 큰 야구를 추구했던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변칙에 능했고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경기시작 1시간 전에 오더를 교환하는데, 경기를 앞두고 김대현의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는 건, 선동열은 이날 경기 이후에 19일 경기에 등판했고(6일 휴식),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던 김대현은 15일 빙그레전에서 10:2로 리드하던 7회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14일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었고 연장 10회에 빙그레가 해태를 3:2로 이겼다(김대현이 등판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었다).

정리하자면, 12일 경기에서 오더교환 직전까지 이상이 없었던 김대현은 경기 시작 전에 급격히 팔 상태가 나빠졌고, 13일 휴식일 다음날(14일)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었으며, 15일 경기에서 10:2로 리드하던 7회에 김대현이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정황증거가 가리키는) 진실은 다음과 같다.

시즌초에 3연패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3연승 이후의 3연패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다음날(13일)은 경기일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김응룡 감독은 선동열을 필승 카드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4월 5일 5.1이닝 구원승 (3일 휴식) 4월 9일 3.1이닝 세이브 (2일 휴식), 개막이후 8.2이닝 투구가 전부였고 80년대 KBO에서 에이스의 등판 일정으로는 조금도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4월 12일 경기의 선발 투수는 선동열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반드시 이기겠다는 김응룡 감독의 의지는 "꼼수"를 발휘하게 하였다.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선동열은 선발 등판에 맞춰서 이미 워밍업을 끝낸 상태였을 것이다(당시 사직구장은 불펜이 노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팀에서 파악이 불가능했다).

물론 김대현이 87년 해태의 주력투수들 중 1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점은 5월 이후이다. 그러므로 기사에서 이 내용이 진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거나 김응룡 감독의 전략인지 꼼수인지는 적중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상대팀 선발의 오버페이스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87년 4월 13일 경향신문 ]



최동원은 4회까지 포볼 1개만 허용했을뿐 무안타로 호투했으나 5회초 집중 3안타를 맞으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현재에 와서 그 어떤 주장을 하든,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정황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꼼수"

개막이후 3연패였던 롯데는 3연승 직전에서 그 "꼼수" 덕분에 상승세가 꺾이면서 바닥까지 추락하게 된다(5월 1일 / 5승 12패). 그리고 5월 16일, 그 유명했던 [최동원-선동열]의 연장 15회 맞대결 이후에 상승세를 타며 종합승률 3위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선동열은 혈기왕성한 만 22세 ~ 24세때 최동원을 상대했다. 84년 혹사로 한 물간 85년 이후의 최동원을 상대하면서도 5번의 맞대결에서 2번이나 비겁한 등판을 했다. 그렇다면 84년 최동원을 상대했다면 선발 맞대결이 존재할 수나 있었겠나?


"올 시즌 첫 황금팔 대결에서 선동열이 최동원에 판정승을 거뒀다."

김응룡 감독의 꼼수가 부각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기자들 수준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겁한 "꼼수"를 판정승이라고 기사를 쓰는 수준이었으니 야구팬들 수준도 바닥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과거 투수들의 실전 투구를 본 적도 없는 현재의 야구팬들이 기록만 보고 단일 시즌 최강 임팩트가 83년 장명부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 83년 장명부는 알려진 것처럼 엽기적인 투수였을까?






선동열 감독되면서 이종범 은퇴는 당연한 결과! yakujoa


81년에 선동열이 참가한 IBAF AAA World Junior Championships는 만 18세 이하의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회이다. 그런데 선동열의 실제 생일이 62년 10월이라는 말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선동열은 이 대회에 부정 참가한 것이 된다.


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 MVP를 차지한 선동열

당시 고교야구 인기 좋을때라 이 대회는 심야 중계되었는데(실황인지는 기억이 안남) 차마 눈뜨고 봐줄수가 없었다. 최정예가 아닌 한국대표팀 연습 상대도 안되는 수준 상대팀 전력에 필자는 2회 이상 볼수가 없었다.

스웨덴같은 팀은 천하무적 야구단보다 나을게 없는 팀으로 봐도 무방하고

일단 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MVP가 자랑스러운 경력 아닌 이유 다음과 같다.


1. 선동열 참가 자체가 창피

선동열은 당시 고교생이 아니라 성인리그인 대학리그 반시즌 마친 뒤였다.

선동열과 같은 학년때 최동원 김시진 구대성 등은 국가대표 세계대회 나갔고 81년 동기생 이상군만 해도 선동열이 고교생 대회 참가할 바로 그 시기 대학선발로 미국 대표팀 상대로 한미대학야구 참가하였다.

다음은 증거자료다.

81년 한미대학야구 명단

투수 = 조도연(원광대) 양상문(고려대) 오영일(인하대) 김상기(인하대) 윤학길(연세대) 김봉근(동국대) 이상군(한양대)
포수 = 이만수(한양대) 한문연(동아대)
내야 = 박종훈(고려대) 김경남(인하대) 이선웅(인하대) 김동재(연세대) 박영태(동아대) 오대석(한양대)
외야 = 조성옥(동아대) 김영균(연세대) 김성한(동국대) 김정수(고려대) 김일권(한양대)

보라! 동기 이상군은 버젓이 대학선발 뽑히지 않았나?

야구 못한 선동열은 당시 여기 못 뽑힌 것이다.




- 세계 각국의 고교생(대부분 2학년생)들과 우정을 나누는 대학생 선동열 -



2. 수준 떨어지는 선수들이 참가

대회수준은 한국대표팀 명단 보면 나온다.

투수 = 김건우(선린상) 조계현(군산상) 이재홍(신일고) 이효봉(대전고) 선동열(고려대)
포수 = 김동기(인천고) 김상국(북일고)
내야 = 배효욱(대구고) 강기웅(대구고) 구천서(상업은) 임동구(군산상) 김경호(진흥고) 조양근(북일고)
외야 = 임경택(마산고) 노승구(중앙고) 최종태(배문고) 최계영(부산고) 전응천(경남고)

이들은 청소년대표 1진 아니다.

면면 보면 알지만 노승구 최종태 전응천 배효욱 김경호 이들이 누구인가? 아마 당시 동대문 야구장 살던 골수 야구팬들도 이들은 생소할거다. 이들은 그해 전국대회 성적 기초로 한 대표가 아니라 시즌전 야구인들 사이 유망주로 꼽히던 선수들 위주로 선발되어 경기력은 떨어지는 선수들이었다.

대전고 이효봉은 중학때부터 유망주였으나 개인적인 문제로 이해 전국대회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는데도 청소년대표로 뽑혔다.

한일고교야구 참가한 청소년 대표팀과 비교해 보자

투수 = 김건우(선린) 박노준(선린) 김정수(진흥) 이재홍(신일) 차동철(광주일) 조계현(군산상)
포수 = 김상국(북일) 장채근(광상)
내야 = 류중일(경북) 조양근(북일) 강기웅(대구) 김태명(전주) 조영일(선린)
외야 = 임경택(마산) 이경재(선린) 이상명(청주) 최무영(경북)

이들이 진정한 청소년대표 아닌가?

1진 아닌 한국팀에게 완패당한 당시 상대팀들 수준이 낮은 것은 당연하다.

선동열 커리어에서 81년 청소년 대회 참가는 자랑스러운게 아니다. 일단 선동열은 대회 참가자 중 유일한 대학선수였고 대회 수준도 이후 대회 정착된 때와는 차이 나는 질 낮은 대회였다.

<참고> 선동열 과대포장은 고교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선동열 曰, 3년 연속 20승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yakujoa


18승을 올릴 때 경기 중간에 나가 구원승을 올렸더니 일부 언론에서 다승왕 밀어주기라며 시비를 걸었다.

출처> 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ports/BaseBall/Article.asp?aid=20090830002707&subctg1=05&subctg2=00


광주일고 후배이자 룸메이트인 이강철이 5회 1사까지 잘 던지고 있었는데 선동열이 5회 1사 이후에 등판해서 9회까지 던져 이강철의 승리를 가로채면서 18승을 따낸 적이 있다.





선동열이 1991년에 20승을 스스로 포기한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예전 인터뷰를 올립니다. 1991년 9월 19일 스포츠서울입니다.

- 왜 자진 강판했나.

이상대의 타구를 잡으려고 껑충뛰어 올랐다가 내려서는 순간 허리가 삐끗했다. 3년 연속 20승도 중요하지만 한국시리즈, 한/일 수퍼게임등 대사를 앞둔터라 부상이 악화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상윤 코치에게 교체를 요청했다.

- 김정수가 2회부터 몸을 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조작된 18승(?)이 끼여있는 20승에 대한 회의감 때문은 아닌지.

그렇지는 않다. 18승으로 인해 물의를 빚은 것은 사실이지만 3년연속 20승마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조규제에게 쫓기고 있는 방어율 때문이라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자기 입으로 분명히 부상때문에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말을 바꾸면 안됩니다.
20승에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예 등판을 하지 말았어야죠. 20승 할 마음이 없었는데 왜 등판을 합니까?
그리고 제 발이 저리는가 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방어율 때문에 내려온 건 아니라고 하네요.

당시 상황을 말하자면 9월 17일까지

선동열 200.0이닝 35자책점 1.575
조규제 139.2이닝 26자책점 1.675


방어율 경쟁이 박빙이었습니다.

선동열이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지 않고 조규제가 남은 2경기에서 8.1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는다면 조규제는 자력으로 방어율왕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선동열 입장에서는 신경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주로 구원으로 등판을 했지만 종종 선발로도 좋은 투구를 했던 조규제였기에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동열이 마지막 경기에 등판해서 3이닝만 던지고 내려가는 바람에 조규제의 방어율 1위는 무산됩니다. 남은 2경기에서 11.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 방어율 1위가 될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완봉승에 추가로 2.1이닝을 더 던져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사실상 불가능하죠.


결론은 이겁니다. 선동열이 3회만 던지고 내려온 것은 방어율 1위를 확실히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처음에는 20승과 방어율 1위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을 겁니다. 하지만 자칫 난타를 당하면 방어율 1위를 그냥 조규제에게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했겠죠. 그래서 상황을 본 겁니다.

3회까지 던졌는데 무실점입니다. 여기서 내려오면 조규제가 연장 11.1이닝 완봉을 하지 않는 이상 방어율 1위는 확정입니다. 마침 허리까지 삐끗합니다. 무리하면 방어율 1위와 20승 모두 날라갈 수 있습니다.

(선동열이 4회 올랐다가 3자책을 한다면 방어율이 1.68, 조규제는 1.675로 1위) 20승이 아쉽기는 하지만 7년 연속 방어율 1위는 확실하니까 큰 미련두지 않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겁니다. 초반에 실점해서 방어율 1위가 위태롭거나 조규제에게 넘어갔으면 달랐겠죠. 방어율을 만회하거나 20승이라도 잡기위해 계속 던졌을 겁니다.


후배의 승리를 가로챈 것은 추잡한 과거입니다. 그럼 가만히 입다물고 있어야죠.
시간이 지나간 틈을 이용해 추잡했던 과거를 미화시키려고 하는군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봅니다.


<참고> 최동원, 선동열 맞대결이 원래 4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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